유한백호, 메리크리스마스:)
솔직히 크리스마스는 유한에게 크게 의미있는 날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떨어져 혼자 사는데다, 친구들과 따로만나 늦은 시간까지 파티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교를 나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니 무료하다면 무료한 날이었다. 뭐, 크리스마스 기념이라는 우스운 명목으로 길거리가 알록달록하게 꾸며지고 묘한 흥겨움으로 사람들이 부풀어있는 것은 그리 나쁜 광경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리 의미없는 날이지만 그래도 올해는 조금 달랐다. 항상 바쁘게 집과 사무실을 오다니는 사람이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심… 아주 조금! 내심 둘이서 뭐할까 하고 기대가 되게 만드는 제 연인이 있는지라 분명 함께 무엇을 하든지 특별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 분명했다. 바쁜 입시도 끝났고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지옥같은 타이틀도 내려둘때가 되었고, 이제 노는 것 밖에 남지않은 유한에게 크리스마스란 어지간히 기대되는 날이었다. 아직 하루가 남았음에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죽비죽 튀어나올 것 같아 괜스레 낙서를 깨작거린 노트를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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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어요? 아까전에 띠롱하고 도착한 유한의 문자가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려 백호는 술이라도 한 잔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 기분이었다. 쏘주말고, 와인두 말구 웬만하면 양주같은거 독한거루다가 얼음도 안띄우구 벌컥벌컥. 그만큼 속이 타들어가고 입이 텁텁하고 씁쓸해져서 몸둘바를 몰랐다. 자고로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과거까지는 백호에게 조직원놈들에게 엉성한 선물상자같은거 하나씩 받구, 보약도 받구, 성재에게 일전에 필요하다고 혼자 웅얼거렸던 것 같은 물건이나 받구, 동문이 아재한테 연락해서 안부나 묻구 저녁에 다같이 모여 새벽녘이 지나 동이 틀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날이지만 올해는! 꼬박꼬박 아저씨, 아저씨 불러대며 조곤조곤 말하는 것이 어지간히 귀여운 제 작은 이웃이자 연인이 있는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데이트라는 것을 하며 보내야하는 것이 아닌가. 애그도 어지간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인지 어제서부터 아저씨, 내일 바빠요? 일 나가요? 늦게와요? 하고 오목조목 물어봤었는디… 결국 크리스마스를 맞아 더 번쩍거리기 바쁜 클럽으로 발을 옮기며 백호는 제 신세에 한숨을 푹, 푸욱 내쉬었다. 땅에 구멍이라도 뚫려 푹, 푸욱 빠져버리고 싶었다. 이 씨팔놈들은 항상 내가 일 있을때만 부르구 지랄이여. 성재에게 선물받은 가죽장갑을 만지작거리며 백호는 급작스레 치밀기 시작한 짜증을 발걸음에 담아 쿵, 쿵 커다란 음악소리에 맞추기라도 하듯 발을 굴러대며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거, 뭐라고 허더라. 와이트.. 아, 그래 화이트 크리스마스. 콧잔등으로 살살 내리앉는 눈송이를 올려다보며 백호는 제 머릿속만큼이나 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아까전까지는 밝은 기운이 남아있었는데… 오늘은 날이 흐리다싶더니만 기어코 눈이 내렸다. 어지간히 늦은 시간이긴하지만 그래도 아직 자정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으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응, 그래, 아직 크리스마스다. 벌써부터 새빨개진 손에 얼른 장갑을 끼우며 백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여, 혁수야 어여! 운전대를 잡을 부하놈을 재촉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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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앞에 우두커니 선 백호는 어떻게 해야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아파트단지로 들어올때 보니깐은 집에 불이 꺼져있던데, 낮잠이라도 들어 여즉 자고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다림에 지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 어제 바쁘냐고 물어오던 초롱초롱 둥그런 눈동자와 오후에 잠깐 일이 있다는 대답에 많이 바쁜가봐요… 하고 목소리를 흐리던 시무룩한 모습과, 몇 시간 전에 왔던 문자가 자꾸만 머릿속에 뒤섞여 화난 유한의 얼굴을 그려냈다. 모처럼 쉬는 날이고 기념일을 챙길 수 있는 날인데, 아이구, 등신, 남백호 등신 천치. 손등으로 제 이마를 퍽퍽 쳐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학을 하며 망설이는 것도 잠시 백호는 조심스레 도어락 커버를 열었다. 띠로롱 불이 들어오는 소리에 혹시라도, 혹시라도 단 잠에 들어있는 유한이 깰까봐서, 그런다고 소리가 작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어깨를 잔뜩 움츠린채 익숙한 비밀번호를 꾹꾹 눌러냈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에 괜히 흠칫거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닫을때 잠금이 걸리는 소리에 또 흠칫거리고. 새벽녘처럼 고요함이 감도는 집 안 분위기에 백호는 심장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자구 있는 것이겠지? 한치의 소음없이 구두를 벗어내고 살금살금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백호는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엌도 가보고 화장실도 가보고 한 눈에 다 들어오는 거실을 서성거리며 한참을 시간을 보내다가 백호는 드디어 유한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그 상태로 또 머리를 문에 콩콩 박아대며 자학을 하길 잠깐 천천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 밀었다. 그리고 어둠이 가라앉은 방 안, 침대 위에 볼록하게 올라온 인영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찡그리고 말았다.
"애그야…"
"…응…?"
"벌써 자구그려."
"아저씨…? 아저씨예요…?"
"그랴. 내 왔어."
백호의 무게가 가해지자 침대가 살포시 울렁거렸다. 그 미세한 미동때문이 아닐 것임을 알지만 깰듯말듯 표정을 찡그리는 유한의 얼굴에 백호는 작게 우쭈쭈 소리를 내며 유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직 남아있는 실외의 냉기에 유한이 몸을 움츠리자, 차가울 것을 알면서도 품에 꼬옥 안고 이마에 입술을 부볐다. 이불과 단잠 속에서 따땃하게 뎁혀진데다 잠기운이 덜 떠난 유한의 얼굴이 그리 귀여울리가 없었다. 눈도 제대로 못뜨고서는 품에서 아저씨… 하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도, 잠결인데도 늦었다며 퉁명스레 내뱉는 목소리도 어쩜 그리 귀여운지 백호는 미안하다고 속삭이면서도 연신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것이 또 불만이었던지 유한의 손이 백호의 어깨를 툭 쳐왔지만.
"한숨자구 인나서 케이크 먹을텨?"
"일어날 수, 음… 있어요…"
"됐여, 더 자자, 우리 애그… 많이 기다렸제?"
눈을 부비는 유한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내리고선 백호는 꼬물꼬물 이불을 끌어올렸다. 둘이 눕기에는 비좁은감이 있지만 이런게 또 로망이라고 누가 그랬었던 것 같다. 무어, 이 나이에 요 어린것과 하는 연애는 무엇을 하던간에 다 로망인지 노망인지 뭐시기구 다 두근거림이구 그러지만. 많이 기다렸냐는 물음에 또 꼬박꼬박 대답하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사랑스러워 백호는 유한의 입술에 꾸욱 제 입술을 마주 대었다 떼냈다. 그러니 유한이 베시시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우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더 자자는 말에 꿈틀거리던 눈썹이 얌전해지고 품으로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금방 잠드는 것이 백호의 말마따나 애기같기도 했고 피곤할 정도로 기다리게 했나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욕을 쳐먹는 한이 있었더라도 일을 잡지 말았어야하는 건데, 후회하며 백호는 유한을 고쳐 안았다. 신년이 코 앞이니 그때에는 동문아재가 멱에 칼을 들이대두 일을 잡지 않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백호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물론, 제 품에 고요히 안긴 유한의 이마에 다시금 입맞추며 메리크리스마스, 하고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