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보리, 메리크리스마스:)

쏘라아 2015. 6. 11. 06:19


"브로디, 좋은 일 있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러네."


 정말이지, 부르지 말라고 열댓번은 넘게 말한 것 같은데 아직까지 꿋꿋하게 불러대는 호칭에 릭은 평소와 같이 툴툴거리며 대답했지만 입꼬리는 평소와 다르게 비죽비죽 올라가 있었다. 마치 좋아 죽겠는데 싫다고 애써 숨기는 대형견마냥 실실거리는 우스운 모습에 짜증을 받은 상대가 되려 허?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좋은 일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상대가 다시 물어왔지만 릭은 없습니다, 신경꺼요! 하고 쿨하게 대답을 흘려내며 뒤돌아서 창고로 들어갔다. 자재 정리해야지~ 흥얼거림이 섞인 혼잣말에 상대는 다시금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 마저도 기분좋은 리듬으로 들리는 릭은 오늘이 최고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업무를 나가야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워낙 북적북적한 블럭에 살고 있고, 사람이 자주 오다니는 가게에 일하는 데다가 크리스마스 장식이며 트리장식, 순록 머리띠, 카드, 양말 등등 잡다한 크리스마스 물품들을 모조리 팔아치워야 하고, Thanksgiving Day만큼이나 매출이 하늘을 찌르는 날이니 어쩔 수 없이 아침에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출근을 해야만 했다. 뭐, 오늘은 보리스도 눈물을 머금고 출근을 하는 날이었으니 혼자 집에서 무료하게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시간도 때우고, 크리스마스 출근 보너스도 받고, 일석이조! 그리고 저녁, 보리스도 자신도 퇴근한 후에는 둘이 오붓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기로 했으니 기분이 좋지않을리가 없었다. 누가 크리스마스를 싫어하겠냐구요, 남녀노소 들뜨는 이 날에! 둥그런 리스장식을 상자에서 꺼내며 릭은 기분좋게 웃었다.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큰일이야.


*  *  *


"미안해요, 릭. 크리스마스라서 난리도 아니네요. 환자들도 많고 차도 막히고…"

"별로 안기다렸어요. 차 많이 막혔어?"

"장난아니더라구요. 중간에 내려서 그냥 뛰어왔어요."

"천천히 오지. 형 손 엄청 빨개요."


 장갑을 벗자 빨갛게 굳어버린 보리스의 손가락을 두 손으로 감싸고 주물럭거리자 보리스가 푸스스 웃었다.

 평일이나 주말도 그렇지만 오늘같은 기념일은 환자가 더하다. 평소에는 어디에 있다가 기념일에 그렇게 하나, 둘씩 튀어나와서 사고를 치고 병원까지 오는 건지.게다가 평소에는 얌전히 꾸벅거리던 아가들은 왜 오늘따라 입에 양초를 넣고, 트리 장식을 삼키고, 밟고, 구르는지. 아기들이 우는 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세이렌 소리처럼 웅웅거리는 것 같아 보리스는 절로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래도 제 차가운 손을 잡고 주물러주며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내는 사랑스러운 연인이 있어 피로감마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신혼부부마냥 둘이서 손을 잡고 이런저런 사소하다못해 쓰잘데기 없어보이는 수다까지 떨어대고 나서야 보리스는 저녁을 차렸고, 릭은 가게에서 가져온 미니 트리에 그만큼이나 작은 장식들을 하나, 둘 달았고 핸드폰을 꺼내 캐롤을 틀었다. 이어 거실과 부엌불을 껐고 먼지쌓인 렌턴을 꺼내와 양초 하나를 켜두었다. 꼭 가난한 부부가 오두막에서 맞이하는 성탄절 같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분위기가 살기도 하고, 오붓하기도 하고, 호롱거리는 불 사이로 보이는 보리스의 웃음이 오늘 생일인 누구누구보다 더 인자한 것 같기도 하고. 릭은 눈을 휘어뜨려 키득거리며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였다.


"자! 먼저 소원 빈 다음에 하나, 둘, 셋 하고 같이 꺼요."

"그건 생일에나 하는거 아니에요?"

"뭐 어때요. 오늘도 주예수그리스도 생일인데."


 장난스런 릭의 말투에 보리스는 정말! 하고 표정을 찡그리며 웃었고 릭은 보리스의 손을 끌어다 기도하듯이 모아 잡았다. 얼른 소원빌어요. 촛불만큼이나 흐릿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눈을 뜬 것은 릭이었다. 깊게 생각할거야 있나. 자신의 소원은 언제나 보리스와 오래오래, 아프지않고, 싸우지않고, 다치지않고, 화목하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해달라는, 어린애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기 싫은 것처럼 굴더니만 꽤나 한참동안 눈을 감고 소원을 빌고 있는 보리스를 보자 입술이 간질거렸다. 말하고 싶은 것이,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소원을 비는 형의 진지함을 지켜주고자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것으로 대신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리스의 속눈썹이 떨리고, 눈이 뜨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호박빛 눈동자가 드러나고,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고, 약속한 듯이 함께 웃으며 촛불을 껐다. 메리크리스마스, 보리스. 사랑해. 간질거리는 입술을 열어 사랑을 속삭이고 나서야 둘의 크리스마스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