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말세, 네가 없는 세계·비·보고싶지만 보고싶지 않아.
최근들어 마르세우스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만히 몽상에 빠지는 일뿐이었다. 몽상이라고 표현하기가 민망할 정도의 사념은 주로 아수라에 대한 것이었고, 그와는 이미 헤어진 사이이므로 결국 그것들은 전 애인에 대해 떠올리는 잡념밖에 되지 않았다.
심각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 너무 빠져들어 물고있던 담배가 뜨끈하게 입술을 건드릴 정도로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도 있지만 주로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자각하고서는 고개를 털어버릴때가 많았다.
생각은 주로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헤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은 잡념에 빠져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을 것이고, 죽어있는 핸드폰이 그나마 팔팔했을 것이고, 열대야에 후끈하게 뎁혀진 밤이 뜨겁게 불탔을 것이고, 음, 대화할 사람이 줄지 않았겠지. 아아, 입이 심심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혼자 속으로 맞장구를 치던 마르세우스는 이유없이 튀어나오는 웃음을 짧아진 담배꽁초와 함께 씽크대로 흘려보냈다. 입술이 뜨끈한 것을 보니 또 잡념이 길어졌던 모양이다.
* * * *
비가 오는 소리에 대충 기워신은 쪼리 사이로 빗물이 새어들어왔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를 끈적하게 채워들어가는 빗물의 느낌에도 마르세우스는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이정도쯤이야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는것이 마르세우스의 성미였다. 추적보다는 질퍽거리며 내리는 비에 칙칙한 색의 우산이 후들거렸지만 그 또한 신경쓰지 않았다. 마르세우스는 또다시 잡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아수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아수라에 관한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빗물이 톡톡 튀겨서인지 입에 물린 담배가 눅눅해짐을 느꼈다. 아니면 이 담배가 원래 눅눅한 종인 것일수도 있지. 여태까지 한 번도 피워본 적 없는 담배를 입에 문 마르세우스는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피워본 적 없는 담배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아수라가 즐겨 피우던 담배였다.
* * * *
기약에 없던 비가 세차게 내려서인지 카페안은 제법 한적했다. 가습기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기가 눅눅하게 목재 테이블과 바닥을 짓눌렀다. 그 습기에 마르세우스는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글라스에 손가락을 뽀득뽀득 비볐다. 조금은 차가워진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제 턱과 목덜미를 스윽 훑어내린 후, 음료를 내온 이후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루드를 올려다 보았다.
"할 말 있어?"
"아수라 안보고싶어요?"
그럴 줄 알았지. 습관처럼 입에 문 담배를 껌마냥 질겅거리며 마르세우스는 큭큭 웃었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습기속으로 찌든내를 내며 사라지고 루드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매장안에서는 금연이라서인지, 루드가 담배연기를 싫어하기 때문일지, 마르세우스의 비웃음때문일지는 정확하게 알지못했다.
"음, 별로 안보고싶은데."
"거짓말."
루드의 미간이 한 번 더 잘게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마르세우스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수라와 헤어진 사실을 가장 처음 알아챈 것은 루드였다. 사실 마르세우스도 아수라도 서로가 이별했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실상 이별이라는 것에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지만 카페에 찾아오는 빈도가 줄어든 것, 그리고 마르세우스가 아수라와의 교제 이래 처음으로 혼자 카페에 찾아온 것을 미루어 볼 때 헤어짐을 짐작했던 것인지 루드는 득달같이 마르세우스에게 따져댔다. 왜 헤어졌어요? 미쳤어요? 그 물음에도 제대로 답변했다만, 루드는 또 빼액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흠, 남의 이별에 신경쓰는 이유를 모르겠네. 마르세우스는 항상 생각했지만 입으로 내뱉었다간 루드의 길다란 장발에 뺨을 맞을 것 같아 폐부로 흡수해 담배연기와 함께 뱉어냈다.
"어떻게 그렇게 물고, 핥고, 빨고, 좋아서 죽던 사람들이 단박에 헤어져요? 그리고 보고싶지도 않아? 마르세우스 생각보다 냉혈한이네요."
"글쎄. 아수라랑은 밥먹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음, 아. 문자하고. 그랬던 기억밖에 없는데. 그 일상이 그리워야 돼?"
"사랑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는데."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않는 낯익은 담배 연기를 루드의 얼굴께로 후우, 흩어내며 마르세우스는 짙게 웃었다. 어떠한 의미도 감정도 담지 않은 일상같은 웃음이었다. 루드는 연기가 맵다며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서는 말도 안된다며 또다시 떽떽대기 시작했지만 마르세우스는 더이상 듣지않기로 했다. 이제 가습기가 조금이나마 승리하고 있는지, 아주 조금 쾌적해진 공기를 코로 들이마시며 입으로는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아직 한참남은 키위주스 위로 썩은 휘핑크림처럼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루드는 듣고있냐며 언성을 높였다.
* * * *
"귀 아파."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한 혼잣말을 해내며 마르세우스는 머리를 탈탈 털었다. 집 안이 후끈한 탓에 상의를 벗어 던진 마르세우스는 물기가 자욱하게 묻어난 수건을 대강 바닥에 내려둔 채 벌러덩 쇼파에 길게 누웠다. 가만히 있으려니 입에 침이 고일 것 같아 담배라도 물자니 담뱃갑이 벌써 텅 비어있었다. 물마시듯이 담배를 펴대니 그럴 수 밖에. 누구누구씨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마르세우스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그립다만 다시 나가자니 질퍽거리는 비를 두 번 밟기는 싫다.
작열하는 열대야의 열기에 금세 마르세우스의 목에 땀방울이 맺혔다. 곡선을 타고 흘러간 땀방울이 뒷목을 적시고, 탈의한 상체가 후끈해지자 마르세우스는 하는 수 없이 손을 쓰기로 했다. 무릎을 덮고 내려오는 츄리닝 바지를 가볍게 벗어내리고 벌써부터 뜨끈하게 열기를 품은 중심을 잡았다. 사막의 중심에 서있는 것처럼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온 몸, 모든 혈관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에 마르세우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뜨거운 숨에 절로 턱이 벌어질 정도의 열기에 휩싸여 있는데도 어딘가 쎄-한 기분이라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렸다. 쿠션을 밟고 미끌어져버린 발을 다시 추슬러 쇼파의 틈새에 단단히 박아두고선 마르세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혀를 달콤하게 울리고 터져나오는 탄성을 습한 공기 아래로 흩어두며 마르세우스는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나른하니 잠이 쏟아졌다.
* * * *
눈을 떴을때는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는 어둠이 솔깃하게 스며들어왔고, 동시에 쏟아지는 바람에 하체가 차게 식자 아차 싶은 마르세우스는 얼른 바지를 기워입었다. 애초에 침대에서 했으면 무리가 없었을 것을. 혀를 쯧, 차며 늘어진 팔을 고개 위로 젖혀 간이 테이블 위의 담뱃갑을 잡았다. 파스슥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 것을 느낀 마르세우스는 아아, 담배 없었지. 깨닫고서는 축축해진 쿠션을 뒤집어 다시 고개를 뉘였다.
아수라와 헤어진 이후로 유난히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아졌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지고, 잡념이 깊어지듯이 이유가 없는 선잠이었다. 딱히 하는게 없으니 체력에 무리가 될 것도 없었지만 깨어있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잡념도 길어진다는 것을 마르세우스는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감기지 않는 시선을 굴려 좌측을 바라보자 쏟아져들어온 달빛에 바닥이 파랗게 물들어있었다. 그것이 마치 바다의 입구같아 묘한 감정이 들었다. 확실히, 아수라와 헤어진 이후로는 바다, 넘어서 물이 두렵다.
시작되려는 잡념을, 마르세우스는 처음으로 덥석 접어버렸다. 푸르른 바닥을 보고있자니 자신마저도 심해속으로 빨려들어갈 뻔했다. 아무리 무감각한 이별이었다지만 이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싫었다. 아수라와 자신의 이별은 단순한 이별에 부쳐두고 싶었다. 사별이라는 어이없는 단어따위는 그와 자신의 이별의 꼬릿말로 달아두고 싶지 않았다. 억지스럽지만 살아있는 자의 여유있는 억지였다.
"잠이나 자자."
몇 번씩이나 벌컥 치밀고 들어오려는 잡념을 애써, 몇 번이고 애써 짓누르며 마르세우스는 가벼운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감았다. 바다를 물리쳐내고 나자 괴로움이 파도처럼 휩쓸려 들어왔지만 잠의 수마가 마르세우스를 달랬다. 문득 루드가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수라가 보고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미 바닥을 치고 가루만 남은 자신의 진심을 200%로 끌어올려 보자면, 보고싶다. 하지만 보고싶지는 않다. 마르세우스는 물음의 종결을 맺고서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네가 없는 세계에서 그리움이나 보고싶다는 감정 따위는 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