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말세, 깨진 유리그릇·젖어버린 시트·여름·사고.

쏘라아 2015. 6. 11. 06:28


어쩌면… 가설을 시작하는 순간 손에서 그릇이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맨 발을 비껴나간 그릇은 바닥에 제 몸을 쳐박고 산산조각 나 복잡하게 흩어졌다. 그 파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마르세우스는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삐그덕거리며 보폭을 넓혀 부엌을 빠져나갔다. 이제는 가운데가 푹 꺼져버린 쇼파에 주저앉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몽상, 아니 잡념이 중증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지난 한, 아니 두 달간의 잡념은 주로 생각은 주로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최근에 하는 잡념은 주로 '어쩌면'으로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아수라는… 어쩌면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정신없는 종류의 사념. 담배연기가 흩어지듯 퍼져나가는 사념덕분에 깨먹은 그릇은 오늘로 열 장째였다. 중증이지, 중증. 이젠 아무렇지 않게 찾게 되는 아수라의 담배를 입에 물며 마르세우스는 쇼파에 모로 누웠다.

 

* * * *

 

 꿈은 언제나 지독했다. 지독하다는 단어가 약과일 정도로 끔찍해, 마르세우가 잠에서 깨어날 때 쯤이면 누워있던 자리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을 정도였다. 항상 그렇듯 꿈의 구체적인 형태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필름의 잔상처럼 남은 기억들은 기억나지 않아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렴풋이 지난 여름의 사고와 닮아있었다. 굳이 기억을 들추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말로 뱉고싶지도 않은 사고는 자신의 연인을 빼앗아갔고 그 후유증은 파도처럼 마르세우스를 덮쳤다.


 아아, 그래, 파도. 시퍼렇게 시야를 뒤덮던 그 물결을 기억해낸 마르세우스는 치밀어오르는 구역감을 참지 못 하고 급하게 허리를 틀었다. 쇼파의 크기가 넉넉치 못한 탓에 마르세우스는 움직임과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지만 쿵, 하는 소음은 제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끔직한 기분이 마르세우스를 둘러쌌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목구멍이 꿀렁거리며 울었다. 무언가 기괴한 것이라도 토해낼 것 같은 고통에 마르세우스는 바닥에 머리를 쳐박은채로 끅, 끅 숨을 들이마셨다. 언젠가 또 이런적이 있던 것 같은데. 눈덩이를 뜨겁게 누르고 지나가는 식은땀을 훔쳐내며 생각해볼 때, 그것은 아마도 아수라가 떠난지 이틀도 되지 않은 날이었다.


 아수라가 떠난 날에는 현실감이 없어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다였다. 눈물도 비명도 나오지를 않았다. 아수라가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꿈처럼 불투명한 사실이었던지라 아직 그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맞겠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나서야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계속해서 꿈이나 착각이나 누군가의 실수로 부쳐두고 싶었던 사실들이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벌벌 떠는 자신의 곁에 기절하고 깨어나는 순간 자신의 옆에 있어야할 존재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또 다시 기절했다. 깨어나고 기절하고를 한참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이틀째가 되는 날의 새벽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뉘여졌던 곳이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혔을때 커튼사이로 비스듬히 쏟아져들어오는 푸르름은 뚜렷하게 기억했다. 자신의 얼굴을 가로질러 전신을 덮는 푸른빛에 마르세우스는 절로 구역질이 났다. 아수라는 익사했다. 하지만 그의 골분조차도 물에 흘려보내야 했다. 한 줌 가루가 되어, 자신을 죽인 물살에 흘려보내며 마르세우스는 통곡했다. 그때의 기분과 이유없는 역겨움에 마르세우스는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때, 마르세우스는 자살 기도를 했다.


 결국은 이렇게 살아있지… 지난날을 떠올리던 마르세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큭, 큭 기침과도 같은 웃음을 토해냈다.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벅찬 숨이 웃음과 함께 쏟아졌다. 동시에 빗물처럼 하나, 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있잖아, 내가 요즘 하는 생각이 있는데 들어봐, 아수라.

 

"보고싶어."

 

 네가 없는 세계에서 그리움이나 보고싶다는 감정 따위는 사치였다. 그립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세게 치고드는 것이 두려워, 그것들을 그렇게 치부하며 떠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빛에 풍덩 잠긴 마르세우스는 흔들리고 있었다.

 있잖아, 어쩌면 아수라는,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있잖아, 어쩌면 나는 너를 따라가고 싶은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사실은 아수라가 떠난 날, 그리고 아수라가 떠난지 이틀 째가 되는 순간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이 이유없는 구역질도 온 몸을 타고흐르는 격한 감정도 단순히 그가 죽었다는 사실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그를 따르고 싶은 충동이 만드는 것이아닐까. 어쩌면. 그래, 어쩌면…

 

"보고싶어, 아수라…"

 

 타액에 젖은 입술이 헉헉거리며 바쁘게 내쉬어지는 숨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추잡한 것이었다.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부질없는 숨이라면 이제는 멈추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마르세우스는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포개었다.

 아수라, 어쩌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코끼리를 등에 짊어진 것처럼 무거운 몸을 팔과 다리로 질질 끌며 마르세우스는 부엌으로 향했다. 기절하듯이 잠들기 전, 자신이 깨어버린 열 장째 그릇의 파편이 가만히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가루처럼 잘게 바스라졌지만 마르세우스의 손에 충분히 잡힐 정도의 조각들이 남아있었다. 마르세우스는 진통제라도 된다는 듯이 깨진 유리그릇의 조각을 쥐었다. 자꾸만 미끌어지려는 손에 억지스레 힘을 주자 벌써부터 손바닥이 찌르르 했다. 하지만,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더이상 고통따위는 필요없었다.

 말라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자신을 가둔 푸른빛으로부터 벗어났다. 지그시 눈을 감자 어둠만이 마르세우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수라, 네가 있는 세계에서 그리움이나 보고싶다는 감정 따위는 필요없을 거야. 이내 가쁜 숨은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