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웽베, Drink me.
쏘라아
2017. 2. 17. 19:06
아무래도 네가 없는 밤은 길다. 네가 함께하는 밤은 지나치게 짧아서, 자연스레 비교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찌됐든 자리가 비어있는 공허함은 가시지를 않아서 떨리는 손을 느리게 말아 쥐었다. 네가 아주 떠난 것은 아니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인 것도 한참이나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함께있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라서. 뻥, 구멍이 뚫린 것처럼 속이 허해서. 그 자리를 채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사내는 잔을 몇 번이고 들이켰다. 찬 바람을 들이 마시는 것처럼, 술이 물인 것처럼, 쉴새없이 들이키는 사내를 주변에서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원래 저렇게 마시잖아. 술잔은 늘어가고, 술병은 사라져가고, 취기는 아릿하게 달아 오르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짐승들이 워낙이 많은 탓에 사내는 자신이 얼마나 마셨는지 조차도 분간하지 못했다. 안그래도 흐린 시야가 더 뿌옇게 물드는 것을 자각하고서는 어지간히 마셨구나, 대강 때려 맞출 뿐이지. 그러니까, 주인이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가 그러다 네 연하 남친이 걱정한다. 조롱섞인 걱정을 건네와봤자 이미 늦었다는 얘기다.
사내는 유난히 술과 친했다. 타고 나기를 굳세서 웬만큼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술냄새나 미미하게 풍길 뿐 겉으로는 드러나지를 않았다. 역으로 말하자면, 사내가 한 번 취하면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버린다는 의미였다. 이성을 잃는 것은 아니지만, 잃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 그렇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유는, 주변에서도 사내의 술버릇에 관하여 이야기할 적에 그게…하고 헛웃음만 띄우는 이유는. 그래, 사내는 취하거든 아주 다른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사내를 관리하는 한 여성이 조언하기를, 자기는 원수 새끼랑 같이 술마시지 말아. 사내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하다 못해 절어버린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제 인생에 다시 없을만큼 순종적이고, 얌전해지는지.
이해할 수는 없다. 왜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 의문을 가져봤자 정답은 알아낼 수 없었다. 자신이 언제 취할지도 모르는데 매 술자리마다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기 귀찮기도 하고. 그리 나쁜 술버릇은 아닌데다, 사내가 취할 정도면 주변도 이미 비슷한 상태였으니 신경 써야하는 이유가 없었다. 다만, 오늘처럼. 주변의 분위기보다 조급하고, 반면에 과열되기 보다는 한 없이 가라앉은 사내가, 조절하지 못하고 혼자 앞서나가 버리니 상황이 조금 우스워지는 것이다. 차였대? 아닐걸. 아까도 전화하는 것 같던데. 그럼 왜저래. 몰라, 미친놈. 수근대는 소리를 뒤로한채 테이블에 엎드리니 머리에 든 것이 온통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말, 마시고 먹었던 것들을 쏟아낼 것 같은 기분에 헛구역질을 하며 테이블을 손 끝으로 긁어 내려야 했다. 벤, 얌전히 있어. 곧 데리러 온다며.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긍하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베니씨!"
아마도 펍 안에 존재하는 모든 목소리들 중에서 가장 어리고 앳된. 가장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다. 흔치 않지, 자신이 그런 호칭을 듣는 것은. 그러니 곧장 너라는 것을 알아채곤 상체를 크게 젖힌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에 뒹굴어 버리고, 웃음으로 방관하는 동료들과 유일하게 부축하는 그. 웨인은 오늘따라 무거운 사내를 간신히, 보다못해 곁에 앉아있던 이들이 두어명쯤 일어나 도와야 했을 정도로 간신히 등에 얹고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힘겹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여기에 내버려두고 갈 수 없으니까. 제 연인인걸. 사내의 다리에 엮은 팔에 조금 더 힘을 가하며, 반쯤은 알 수 없는 말로 떠드는 이들을 뒤로한채 성큼성큼 펍을 나섰다. ..사실, 비척비척이지만.
밤공기가 차다. 뺨에 붉은기가 오를듯 말듯 위태로울 정도로. 그러나 커다란 짐승을 등에 업고있는 웨인은, 사내보다 조금 더 체온이 오른 상태였다. 힘이, 아, 안돼, 넘어질 것 같은데, 안돼, 안돼. 위태롭게 허공을 내젓던 발걸음을 쿵, 바닥에 찧으며 그는 꿋꿋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슬그머니 웃음이 떠오르는 것은 이렇게 취해버린 사내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좋아할 일이 아닌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면 목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고개를 움푹 쳐박은 사내가 보인다. 자세를 고쳐주려 몸을 움직이긴 했으나 자신에게 더욱 무게가 가해질 뿐이라서, 사내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만을 추스리고는 포기해 버렸다.
"웨.. .."
"베니씨, 깼어요?"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무어라 말한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조각은 아니었던지라 꿈쩍 놀라 돌아보면 사내는 자신이 추슬러준 자세 그대로였다. 조금 몸을 꿈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후에 들려오는 음성이라곤 숨소리 뿐이어서 그저 잠꼬대나 술주정이었나보다 가늠하며 마저 발걸음을 딛었지만. 그러나 이내 다시금 이.. 사내가 무언가를 뱉자 웨인은 그대로 우두커니 멈추고야 말았다. 사내가 깰 것 같으니 아주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가는 것이라며, 아주 잠깐 쉬는 것 뿐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며 근처의 벤치에 사내를 앉혀두고 옆자리에 털썩. 자신을 압박하던 무게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온 몸이 뻐근했다가, 나른했다가, 저릿했다가. 이내 쭉, 기지개를 켜고는 늘어진 사내의 머리를 제 어깨에 받쳐 두었다.
"일어나봐요, 베니씨."
"..싫어.."
대답할 줄은 몰랐는데. 웨인의 눈이 둥글게 감겼다가 뜨인다.
"술 깬 거예요?"
이번에는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고.
"베니씨?"
"디샤넬.."
아, 이번엔 대답했네.
"저 여기 있어요, 베니씨."
"안아줘.."
꼬물꼬물, 사내에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으나, 지금 그만큼 어울리는 의태어도 없었다.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한 사내가 스르르, 웨인에게로 쏟아졌다. 느리게 뻗어진 사내의 팔이 웨인의 허리에 감기고, 고개는 쇄골 아래에 무겁게 처박힌채로 고정되었고, 이후엔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크게 숨소리를 몇 번 고릉댔다. 이내 분명하게 자신을 감싸오는 온기에 사내는, 조금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정신이라도, 술기운이 잔뜩 묻어 흐려진 이성이라도, 기꺼이 자신을 끌어안는 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차가운 새벽은 따뜻해졌다. 자신이 내내 기다렸던 온기. 잠시간 떨어져 있는 시간마저 아까웠던 체온. 조금이라도 잊을까 몇 번이고 되새겼던, 네, 음성.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사내는 그를 끌어 안았다. 두 팔과 두 몸이 엉키고, 완전히 포옹하는 형태로 맞물려졌을 때 사내는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낯선.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만큼 자신의 가슴 속 깊이에 들어와있는 그리움을. 누군가가 보고싶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립다는 것은 이리도 절절하고 외로운 감정이라는 것을 오로지 너. 웨인 디샤넬, 네가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결코 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래도. 재회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달아서 사내는 조금 더 웨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