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11. 06:16


"Hey, 브로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모자를 벗자 부스스하게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정리하며 릭은 한껏 짜증을 부렸다. 10살짜리 계집애 같아서 싫다는 애칭을 굳이 불러대는 상대도 그렇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정말 되는 일이 없는 그였기에 평소 이상으로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긴 했다. 상대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무슨 일이 있냐며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어왔고 릭은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앞치마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신경질을 부린 자신에게 또 신경질이 났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릭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직원용 앞치마는 무엇인지 모를 이물질들이 눌러 붙은 데다 잔뜩 주름이 가있었다. 언젠가 가게에 놀러왔던 제 연인이 세탁을 해줄 테니 집으로 한 번 가져오라는 말도 한 적이 있었다. 그 날은, 마침 릭이 혼자 마감을 해야 하는 날이었고 늦는다는 문자하나 보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으며 운동화 끈이 풀어져 밟고 거하게 넘어진데다가 겨우겨우 가게 문을 닫고 정산해보니 총 매출이 20달러씩이나 모자랐다. 아무리 다시 계산하고 가게를 쥐 잡듯이 뒤져보아도 20달러는 메꿔지지 않아 결국 자신의 지갑을 열어야했고 그러다보니 머리에 제 연인이나 앞치마 생각은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집에 가기 위해서 문을 열었을 때 기적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고 영화처럼 자신은 우산이 없었다. 그렇게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운수가 더러운 날이었는데, 다른 일은 그저 짜증나는 일이었다고 제 연인과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화룡정점을 찍는 불운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싸우고 만 것이다. 누구와 싸웠겠는가, 자신의 연인이지.

 축축히 젖은 상태로 집에 들어섰을 때 제 연인은 버럭 화를 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자신이 사라진 20달러를 찾으려 가게를 뒤지던 그 때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어댔다는 사실이 뒤늦게 서야 떠올랐고─물론 전화가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치미는 짜증 속에서 핸드폰 벨소리는 불쾌한 잡음일 뿐이었다.─ 자신의 잘못임을, 보리스─제 연인─가 얼마나 걱정 했을 지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오늘의 불운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가득 쌓인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웃어넘길 자신이었지만 덜컥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고,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 보리스는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그렇게… 새벽을 불태울 말싸움이 시작되고 만 것이었다.

 싸운 이후 맞는 아침은 끝내주게 좆같았다. 쇼파에서 자고 있던 자신은 어느새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고 아마도 보리스가 새벽에 몰래 덮어준 것 같은 담요는 발에 휘감겨 있었다. 어깨며 허리가 욱신거렸고 보리스는 이미 출근한지 오래였다. 쇼파에서 이불도 없이 잔뜩 웅크리고 자고 있는 모습이 가엾어서 담요를 덮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풀린건 아니라고 말이라도 하듯이 항상 아침밥이 차려져있던 식탁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뭐, 내 업보려니 싶어서 묵묵히 집을 나서긴 했지만.

 

“하아…”

 

 허리에 두른 앞치마의 매듭을 꾹, 동여매고 릭은 대충 세면대에 걸터앉았다. 젖어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살짝 뒤로 기울여 거울에 쿵, 뒤통수를 기댔다. 보리스 보다야 늦은 출근이긴 하지만, 올빼미나 다름없던 과거의 제 생활패턴에 비한다면 굉장히 이른 시간에 해야 하는 기상은 언제나 괴로웠다.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출근까지 해야 하니 담배가 절로 생각났다. 사랑하는 연인과 싸운 후의 아침이니 더더욱.

 제 마음처럼 꺼멓게 타들어가는 담배라도 물고 깊게 생각에 잠기고 싶은, 아릿한 기분이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에 속상함을 한껏 느끼며 릭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바탕화면에 가득 찬 보리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다투었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먼저 잘못한 것은 자신의 쪽이었고 마지막엔 눈물까지 글썽였던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미안하다고 말 한마디 못하고 새벽을 보내어 버렸는데, 형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공과 사는 뚜렷한 똑똑한 사람이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든가 실수한다든가…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보고 싶었다. 아침에 얼굴도 못 봤으니 이렇게라도 봐야지 싶어 홀드를 풀자 메시지 모양이 두둥실 떠다니며 릭을 맞이했다. 아침부터 연락 올 데가 없는데. 그렇게 부지런한 스팸러들이 있단 말이야? 잔뜩 짜증을 부리며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릭, 출근은 잘 했어요? 어제 늦게 들어왔는데 또 늦잠 잔 건 아니죠?]

[..잔소리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어제 일은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얼른 일어나서 일 나가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랑해요, 릭. 정말 미안해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말 미치겠다.’였고. 이어서 든 생각은 ‘진짜 미치겠다.’였다. 세 번째로 든 생각도 그 비슷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생각이나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미친 듯이 보리스가 보고 싶었고 명백히 사과 받아야 할 입장인 사람이 먼저 애정 어린 문자를 보내왔으니 릭은 미안함과 사랑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가만히 굳어 버린 채 문자를 수 십 번씩이나 다시 읽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 바빠요? 전화할 수 있어요?”

 

 내가 당신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말이 꼭 하고 싶은데 바쁘지 않으면 좋겠어요. 릭을 부르는 목소리가 문 밖에서 시끄럽게 울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그따위 조잡한 업무들이 아니었다. 이순간 자신이 신경 쓸 것은 다소곳하게 ‘네’하고 답해 온 목소리. 그 하나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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