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일이라고 명빈은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앞을 더듬어 쥐이는 보드라운 자락을 끌어다 더듬더듬 접어내고, 손가락에 걸려오는 노리개를 가져다 손 안에 가만히 쥐어보였다. 어머니. 부르는 것조차 죄스러운 그 호號 석자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리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서글프니 그녀가 유일하게 남긴 것은 제 목숨줄 하나라고 하자. 손바닥을 간질이다 바닥으로 뭉툭하게 떨어지는 서글픔 하나라고 해두자.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때나 찾아오던 어둠이 이제는 끝없이 눅눅하게 명빈을 짓눌렀다. 바깥은 하염없이 소란스러웠으나 자신이 보고있는 것은 하염없는 어둠이어 고요하기도 했다. 자신은 다시는 앞을 보지 못한다는 두려움. 다시는 제 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서러움. 다시는 저가 그리 좋아하던 낡은 서적과 글귀를 읽어내릴 수 없다는 절망감. 고요의 틈새로 스며드는 어둠만큼이나 눅진한 감정에 명빈은 울음을 참아내었다. 울음은 어미가 하직하던 그 날에 전부 쏟아내었으니 더이상은 울지 말아야지. 굳세어야지. 열세살 남짓한 작은 소년이 삼켜내는 감정은 너무나도 커다랐지만 그래야만 했다. 자신만큼이나 쓴 물을 삼켜내는 이가 바깥에 있었으므로.
남성의 비명소리를 마지막으로 바깥이 고요해졌다. 자신이 보는 세상만큼이나 싸늘하게 찾아든 정적이 두렵지는 않았다. 예상하던 것이었고 어쩌면 저어기,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일어나길 바라던 일일지도 모르니. 고요가 길어졌다. 침묵이 죽은 개의 혓바닥마냥 길게 늘어졌다. 바깥에서 우두커니 서있을 제 형제의 심정을 기리듯 숨소리 마저 집어삼킨채 그 침묵을 함께 나누었다. 이윽고 끼익, 끝난 비명소리와도 같은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릴 적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림잡아 매듭지은 보따리를 들고 방을 나와 어림잡아 명신의 손을 잡았다.
"가자, 명신아."
눈도 안보이는 치가, 한 치 앞도 안보이는 미래로 어떻게 걸어 가자는 것일까. 명신에게 썩 우스울 법한 말을 하면서도 어긋났던 손을 다시금 맞잡았다. 무엇으론가 젖은 손가락을 미끌어지지 않게 엮고, 굳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꺼끌한 손등을 감쌌다. 그에게 단 한 번도 형으로서 무언가를 해준 적은 없지만. 형으로서 무언가를 도운 적은 없지만. 형으로서 무언가를 이루도록 밀어준 적은 없지만. 다만, 이 손 하나. 노여움에 머리가 끓어 자신보다도 더 앞을 보기가 힘들 네 손을 붙들어 바깥으로 이끄는 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불길이 거세게 솟구쳤다. 가옥을 나서던 명신이 던진 횃불은 즐비한 시체를 타고 기둥으로 번져들어 기어코 지붕까지 기어올라갔다. 명빈의 눈에도 그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어둠으로 끼어둔 한 줄기 빛. 희망이라기엔 까맣고 절망이라기엔 불타오르는 것이. 그것을 가만 들여다보던 명빈은 손에 쥐었던 노리개를 불길 사이로 던졌다. 그래도 제 아비라는 자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자비였다. 어머니가 그를 사랑한 것도, 그리하여 자신이 태어난 것도 그 누구의 잘못은 아니었으니. 가자 명신아. 명빈은 다시 명신의 손을 잡아 끌었다.
우리는 가자, 명신아. 우리가 더이상은 울부짖지 않고 마음이 찢어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명신아, 가자. 우리가 질식하지 않고 숨쉴 수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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