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2016. 8. 5. 05:37


더운 바람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냉기라고는 하나 없는 날씨에 감상을 가지려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과거, 현재, 미래. 어느것에 초점을 둬야할지도 모르겠고. 사실 이쯤되니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결국 이제는 습관이된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터엉, 자그마한 사념도 없이 텅 비어버린 머리에는 단어 한조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닥에 꽂혀있던 시선이 천천히 허공을 훑다가 정면, 이어서 하늘로 가 닿았다.


"날씨 좋다.."


작은 혼잣말이 적막을 가로질렀다. 흐려지는 말꼬리 끝에는 쪼개졌던 적막들이 바쁘게 모여들었지만. 자신이 중얼거린 말이 귓가를 두둥실 떠다니다 금방 사라졌다. 그럼에도 아직 귓가에는 무언가가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것은, 제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새하얗고 새파란 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이 시려오는 것일까,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목소리가 아직도 떠올리면 마음을 찌잉, 울리게 만들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찌됐든. 눈으로 뭉게뭉게 물기가 스며드는 탓에 로저는 고개를 푹 떨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왔고 수십 번, 수백 번 감정을 참아왔음에도 여즉 서툴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은 참 슬픈 일이지. 하지만 '또 우냐.'하고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금방 고개를 쳐들었다. 우는 모습을 들켰나 싶은 조바심도 아니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당혹감도 아니었다. 그저, 작은 한숨조차도 자신에게는 위로라서. 내내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을 잠시라도 내려두게 만드는 위안이라서. 툭, 애달프게도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떨리는 입술이 간신히 웃음을 띄우면 꽤… 못볼 꼴이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짧은 인생, 그 모든 시간을 도망자의 삶으로 살았다. 아버지를 피해서, 혼자인 자신을 비하하는 목소리를 피해서, 폭력을 피해서, 멸망을 피해서, 죽음을 피해서, 결국에는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피해서, 끝내는 생존을 찾기 위해서. 무어가 그리 무섭고 두려웠는지 이제는 우스울 지경이었다. 이제는 '끝'이라는 것이 도래한 도시 가운데 앉아있으니 더더욱.

 블랙 사바스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꼭 자신이 존재하던 모든 곳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무너지는 가운데 자신만이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지. 모두가 현실에 익숙해지고, 미쳐가거나 미쳐버린 가운데 자신만이 혼자 웅크리고 떨었으니까. 어떻게 여기에 왔냐는 물음을 질리게 들을만큼 군중에 물들지 못했으니까. 그런 자신을 비난하기도 했다. 내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무리에 속하지 못한 이들에게 기꺼이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 됐었으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는 인간성을 아예 집어던질 수 있었으면. 자책과 환청으로 시달리던 지난 밤들이 다 꿈인 것만 같았다. 이제 다 끝이니까. 누군가에겐 시작일 수도 있고, 하나의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겐 끝이었다. 하나둘씩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 깊게 느꼈다. 진짜, 끝이구나. 끝이라는 말이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정신병의─그는 스스로가 '정신병을 앓고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처방전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악몽에도 끝이 있는 것처럼, 끝이 찾아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이 평생을 동경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가운데 생각했다. 내가 죽이지 않아도 누군가는 죽고, 내가 무너뜨리지 않아도 무언가는 무너진다. 자신이 존재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 존재들이 모든걸 망가뜨리니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한 번 떠올린 사념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가시를 세우고 결국에는 가시넝쿨이 되었다. 그것이 자신의 위기감을 찌르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시넝쿨 속에서 누군가가 일렀다. 어차피 네가 없어도 상관없잖아. 네가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해주잖아. 그럼, 너는, 여기에 왜 있어? 자신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네가 존재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잖아. 아무도, 네가 필요하지 않아. 가시에 찔리는 것보다 아픈 자책이 자신을 무너뜨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아들로서도 친구로서도 이제는 군중의 일원으로서도.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그 어느곳도 없다는 것. 자신이 자신으로서 하나의 존재로서 곁에 머물렀으면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너만이 할 수 있다고, 자신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곳이 없다는 것. 자기 비하는 언제든 쉽다. 가시를 바깥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세워 결국 제 목을 찔러가며 자해하는 그에게는 더더욱. 한 번 떠올린 생각은 쉽게 떨쳐낼 수도 없었다.

 필요가 없다는 것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맞는 말이지. 필요하지 않은데 존재할 이유가 무어 있을까. 역으로 말하면 자신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금 가시넝쿨이 묻기를, 너는 왜 살아있니? 자신은 답하길, 그러게. 헛웃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럼에도 삶의 의지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순전히 겁쟁이이기 때문이었다. 죽기 무서워. 사라지기 무서워.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무서워. 타인의 죽음과 스스로의 죽음은 그 무게가 다른 법이었다.


결론적으로 자신은 매달릴 곳이 필요했다.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붙들어줄 사람. 일말의 자존감도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나무랄 사람. 살면서 그 어떠한 욕심도 부려보지 않았던 자신이 욕심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위기감으로 느껴졌다. 벼랑 끝에서 한 발을 앞으로 뻗고 있는것만 같은 그런 위기감 있잖아. 온 몸이 휘청거리고 무게가 쏠려 앞으로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정말 끝인데,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싶어도 그러면 안될 것 같은 기묘한 위기감. 하지만 누군가가 뒤에서 붙들어준다면 기꺼이 발걸음을 무르고, 뒤돌아볼 마음이 있었다. 그 손에 매달리고 구걸할 수 있었다. 그거, 잘하거든.


결국엔 슬레이라는 사내가 제 구원과도 같았다는 말이다. 진실은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말해도 변하지 않는 법이니. 그가 직접적으로 '네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자신이 그에게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진심이든 아니든, 자신이 필요하다는 의도가 담긴 말을 제안으로 건네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사실은 무서웠으니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까. 어디까지 떨어질지도 모르고,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울지도 모르고,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니까. 그러므로 자신을 뜯어 말린 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자신이 매달릴 여지를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의미없던 삶에 한 가지,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단 한 가지 생겼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살아있을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다.


로저는 퐁당, 빠져있던 사념에서 가까스로 헤어나왔다. 갑작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제 머리카락이 온통 뒤집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두 눈을 꿈뻑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가야지. 여러가지 의미로 가벼워진 가방을 고쳐메면 습관처럼 가시넝쿨이 자신을 찔러왔다. 도망칠거야?


"음…."


대답을 찾아 헤매였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이 간단히 대답할 수 있었다. 응. 도망칠거야. 그러면 또 따끔따끔, 가시에 찔린다. 또? 응, 또. 어디까지?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떼도 될까, 잠시간 망설이던 발걸음을 옮긴다. 첫 발걸음은 언제나 무겁다. 하지만 한 번 제자리를 벗어나면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도망치는건, 자신있으니까. 평생을 도망쳐왔으니까. 누군가가 이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자신은 멈추지 않았다. 그게 맞는줄 알았거든. 도망쳐야만 하는 줄 알았거든. 사실은, 아직도 그런 것 같아. 도망가야해.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도망이다. 가볍게 새어나오던 웃음이 온 얼굴에 떠올랐다. 바다마냥 물기가 아리게 서렸던 눈가도 이제는 보송보송, 가벼워졌다.


그런 곳이 존재할까? 이미 발걸음을 뗀 자신은 대답했다. 당연하지. 거의 다 왔어. 이어서 마지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질문 하나가 새어나왔다. 그곳을 위해 네가 존재해? 그러면, 자신은, 마치,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가득히 웃음을 띄우며 답했다. 응.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있는 답이었을지도 모르지. 자신은 도망쳐야하고, 어딘가에는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존재하고, 자신은 그곳을 위해 존재하고. 조금 어렵고 복잡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로저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일 수도 있지. 상관없었다. 그냥, 됐어. 이제. 자신의 짐작대로 한 번 바닥에서 떨어지니 멈추지 않을 것처럼, 바쁘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한다. 거의 다 왔다고 했잖아.


"러셀.."


자, 봐. 코앞이야. 더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곳.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자리에 그가 서있다. 들리지도 않을만큼 작은 목소리로, 입술에 올리는 이름은 여즉 낯설었다. 그 낯섦 마저도 기쁘다는 사실은 자신 혼자서만 간직할 비밀이었다. 열쇠는 가시넝쿨 사이로 꾹꾹 쑤셔 넣기로 한다. 복잡하게 얽힌 가시넝쿨은 당분간은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을테고, 완전히 사라지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테니까. 평생을 안고있던 것인데 한 순간에 사라지지는 않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안에 숨겨놨던 열쇠를 찾게 되고, 비밀을 열고, 그에게 내보이게 되겠지. 혼자 간직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을 공유하는 일은 짐작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래도 견딜 수 있을만큼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건 아마, 공유하게 될 상대가, 목적지가 되어준 당신이라서.


잠시간 느려졌던 발걸음에 다시 속도를 가했다.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가 완전히 그의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러셀, 그를 의미하는 이름을 불렀다. 아까보다 또렷하고 명확한 음성으로. 그제야 한 평생 목적지 없이 헤매고 도망치던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처음이다. 쉬어 가거나 잠시 들르는 것이 아니라 도착했기 때문이 멈춰서는 것은. 꽤 생소한 느낌이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제 목소리에 러셀이 돌아보자마자 로저는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고맙다는 말 따위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히 채웠기 때문에. 조금 울 것 같기도 하고, 숨이 벅차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참는 것은 익숙하니 그런 자잘한 반응 따위는 서툴더라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 눈물 대신 환한 웃음을 띄웠다.


자, 봐. 도착했어. 더이상, 도망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되는 곳. 그러니까, 나를 필요로 해서, 내가 꼭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곳. 그래서, 더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지금, 도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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