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2015. 6. 11. 05:46


열, 열하나… 열셋. 커다란 글라스에 얼음조각을 채워넣던 윤호는 맨 위에 탑처럼 쌓인 조각을 마지막으로 테이블에 집게를 내려두었다.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 된 얼음탑이었다. 윤호의 자그마한 얼굴을 반 쪽 가리고도 남는 글라스의 크기가 놀라워 맨 처음에는 럼주가 얼마나 들어갈까 생각했다. 그 이후에는 옷핀이 얼마나 들어갈까 생각했고 그 이후에는 아아, 얼음이 몇 조각이나 들어갈까 생각했다. 그리고 조각의 모양이 허하는대로 담아 본 결과 열세개의 얼음조각이 글라스에 담겼다. 가장 처음에 담아 바닥에 짓눌린 조각이 삐끄덕 소리를 내며 갈라지자 얼음탑이 흔들리며 열 세번째 얼음조각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그 반동에 못이겨 열 둘, 열 한 번 째 조각도 함께 테이블로 낙하했다. 재미없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리저리로 뒹구는 얼음조각을 내려다보던 윤호는 열 번 째 조각을 들어 입안에 쏘옥 넣었다. 입술을 시리게 스치고 들어가 치아와 여린 볼 살을 자극하는 냉기에 고운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이내 평정을 유지했다. 아무래도 의미없는 행동이었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윤호는 테이블을 등진 채 창고로 향했다. 달달하니 럼주가 마시고 싶었다.


 후지고 호화스러움을 떠나 선박에서 마시는 럼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얼핏 주워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던 윤호는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윤호는 차멀미는 물론 배멀미가 심했다. 어릴적 깔끔한 세일러를 차려입고 배에 올랐던 윤호가 출발한지 20분도 채 되지않아 머리를 붙들고 끙끙 앓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얗게 서리가 낀 글라스를 손가락으로 뿌드득 긁어내던 윤호는 그날의 어지럼증이 다시 치미는 것 같아 눈을 흐릿하게 떴다.


 더불어 윤호는 고소공포증이었다. 비행기는 물론이요, 2층 높이의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윤호에게는 고된 일이었다. 이전에 자신의 증상을 몰랐던 윤호가 전용기에 올랐다가 온 몸에 흐르는 혈액이 하강했다가 상승했다가 혹은 온 몸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소용돌이치던 감각에 그만 혼절해버린 기억이 있다. 그 때의 뼈저린 공포가 어지럼증과 함께 닥쳐오는 것 같아 윤호는 이제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극심한 차멀미, 배멀미, 그리고 고소공포증. 그러니 윤호에게 자연스레 들러붙은 호칭이 있었으니 히키코모리. 일본에서 유래된 병명인지라, 문외한인 윤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주치의는 그리 이야기했다. 하지만 인터넷에 물어 알아 본 이후에도 윤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밖으로 나가고 싶지않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이 장소와 이 땅을 떠날 의도와 마음과 재력이 충분히 있었다. 단 하나 그의 의도를 따라주지않는 것은 몸밖에 없었다. 그러니 히키코모리라는 병명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 윤호 자신만은 그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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