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담배가 간절히도 떠오르는 새벽이었다. 별은 뜨지 않았고 달은 구름에 파묻혀 자취를 감춘, 숨소리를 가볍게 죽여야하는 새벽. 비가 그친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하늘이 유난히 꿉꿉해보였다. 하숫물에 젖은 솜사탕마냥 커다랗게 덩어리진 시커먼 구름은 올려다보고 있기만 해도 후덥지근해지는 기분이 들게 해 성재는 손을 올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냈다. 기척을 숨기려고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꽈악, 목을 졸리는 기분이었다. 넥타이를 풀어내어도 누군가가 손으로 짓누르고 있는듯한 답답함에 한숨이 넘쳐 흘렀다.
불만은 없었다. 자신의 보스라는 이는 지긋한 아저씨가 된 지금도 이따금씩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렸지만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자신이 믿고 따라야할, 지켜내야할 존재였고 충분히 그런 취급을 받을만한 존재였다. 그의 곁에 연인이라는 무거운 이름으로서 달려있는 작은 소년도 그 어른스러움에 감탄할 정도였고. 피어나는 새싹 조직들의 난동으로 어지러웠던 뒷골목도 오늘부로 조용해진 참이었다. 밀린 대금들도 항상 그러했듯 말일에 허리띠를 졸라매듯 압박을 주면 꼬박꼬박 들어올 셈이고. 성재가 맡은 업무들은 모든지 놀라울 정도로 착착착 해결되어 나가는 중인데도 어딘가 마음 한 켠이 휑했다.
결국엔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주머니에 꽁꽁 넣어두었던 담배갑을 꺼내들었다. 편의점에서 산 뒤 비닐팩도 뜯지 않은 담배갑이 빳빳하게 날이 서 성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길거리, 가로등에 모로 기대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벌써부터 쓴 내가 입 안을 강하게 찔러댔다. 감성에 푹 절은 감성소년마냥 축축 가라앉는 기분에 쌉싸르한 담배연기를 끼얹자 어디서 비라도 맞으며 청승을 떨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기분 사이에는 그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미소짓는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
담배연기가 입술을 빠져나가는 느낌 속에서 당신을 떠올렸다. 입 안, 입술 사이를 잔뜩 간질이는 것이 꼭 당신의 입맞춤과 같았다. 간지럽고 동시에 뜨겁고 하지만 뱉어내야만 하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언제였더라 가늠해보았지만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무리였다. 당신이 보고싶었다. 두 팔로 힘껏 끌어안다고 생각하고 보면 처음부터 자신의 품에 있지 않았다. 가까스로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면 또 저멀리 가있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원래가 어려운 법이었지만 상하관계나 업무관계 외의 관계는 처음… 아, 재훈과 자신의 관계를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 턱하고 막혀버린 기분에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아냈다. 꿉꿉한것은 비단 하늘뿐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배는 뭉그렇게 가라앉은 제 심정을 달래던 담배를 툭 떨구며 성재는 가까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담배를 들고있던 손만큼이나.
뜨겁게 당신이 보고싶다.
2.
"성재씨는 내가 그만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 할거예요?"
툭, 재훈의 장난스런 말이 던져지자. 툭, 성재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레 멈추었다. 그리고 툭, 재훈의 손에서 놀아나던 볼펜이 데굴데굴 테이블을 타고 굴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지한 말도 아니었거니와 의도한 것도 아니건만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농이었는데 예상대로 우두커니 굳어버린 성재의 모습에 재훈은 웃어야할지 미안해해야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는 그의 반응이 좋았다. 자신이 무어라고 말하든 의미 그대로.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단점이라면 단점, 장점이라면 큰 장점이었으니까. 오늘도 끝내주게 솔직한 반응에 재훈은 결국 작게 미소를 그리고 말았다.
"놀랐어요? 미안해요, 나는 그냥 장난…"
"질리셨습니까?"
아, 예상했던 반응. 손에 들고있던 서류를 천천히 책상에 내려두며 낮게 물어오는 성재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항상 진지한 사람이긴 하지만 격앙되려는 감정을 어거지로 내리앉히는 듯한… 잔뜩 일렁임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가여웠다. 아, 그러니까 자신은 진짜 농담이었다니까. 그래, 순진한 사람을 놀린 내 잘못이다. 말이 너무 심했지? 싶어 웃으며 성재의 말에 대답하려는 찰나.
"저는 손에 넣은건 잘 놓치지 않는 편입니다."
"응?"
"보스도, 부하들도, 거래처도, 그리고 당신도. 놔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어…"
"질리셨다면 마음껏 달아나셔도 좋습니다. 다시 잡으면 됩니다."
자신이 아는 유성재가 맞나 싶을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니, 아니다. 오히려 아무 감정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무미건조하고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였다. 너무 당연한 일을 굳이 입밖으로 꺼내게 만들었다는 듯이, 항상 해오던 말이라는 듯이. 그는 소유욕이 질펀하게 묻어난 말을 하면서도 표정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흐트러진 서류를 곱게 정리해 책상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다시 잡으면 됩니다. 한 입거리인 사냥감을 잡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말을 뱉어내던 순간의 성재의 눈빛은 흉흉했다. 정말로 달아나봐. 그럴 배짱이 있으면. 그렇게 재훈을 도발이라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실로 위협적이기도 했다.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자연스레 사그러들만큼.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성재가 그리 커보일 수가 없었다. 실제로도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손도 배는 큰 사람이건만 오늘따라 휘몰아치는 위압감에 재훈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검은 와이셔츠 위로 엇나간 넥타이를 똑바로 고쳐잡은 그는 재훈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건만 모든 순간들이 슬로우모션으로 느껴져 한참, 정말 한참인 시간이었다. 어딘가 얼이 빠진듯한 재훈의 뺨을 투박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리며, 성재는 평소처럼 웃었다.
"같이 나가죠. 점심시간 끝나겠습니다."
평소와 같은 웃음, 평소와 같은 목소리, 평소와 같은 다정함. 뜨거웠던 눈동자가 사라질듯 말듯 웃음을 그리는 것을 보며 재훈은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조폭이긴 조폭이구나. 살떨리게 느끼고야 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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