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11. 06:24


맨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보리스는 직감적인 불안감에 발 아래가 까맣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 때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브로데릭 로만씨가 사고가… 딱 세마디. 그 세마디에 따사로운 오후로부터 지독한 현실로 쳐박히게 된 그는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었다. 심각한 일이 아닐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에 떠는 자신을 보고 여느때처럼 형, 하고 환하게 웃는 그를 마주하게 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떨리는 손을 다잡고 가방을 챙길새도 없이 강의실을 뛰쳐나오면서도. 못내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게 된 현실은 그 불안감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작디 작은 불안감이라는 씨앗이 커지고 싹을 틔워 불행한 현실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모든것은 나로부터 발아한 것이겠지. 보리스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죄책감과 그보다 더 잔인하게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


 기억을 소실하는 병이나 현상, 후유증은 의료학을 전공하는 보리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실습중인 병원에서도 단기적이거나 장기적인 기억상실증을 앓는 사람들을 더러 보기도 했고, 퍼즐조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일정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것은 그리 기억의 파편을 잃은 환자들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부모나 친구 혹은 연인. 기억으로부터 사라진 혹은 유일한 기억이 된 그들의 슬픔은 병실에 빼곡히 들어차 차트를 넘기는 보리스마저도 먹먹한 감정에 물들게했다. 하지만 그리 그들을 동정하면서도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들 중에 하나가 될 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게 될 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은 사라진, 없어진, 잊혀진 기억이 될 줄은.

 다행히 외상이 크지는 않아요. 일주일만 더 쉬면 뛰어다녀도 될 정도예요. 그래도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 자체가 환자한테 큰 상실감일 수도 있으니까 주의해주시면 될 것 같고…… 이후에 잔뜩 웅얼여지던 주치의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았다. 몸이 성한 것은 확인했고, 기억이 성하지 않은 것도 확인했고, 이제 자신이 할 일은… 그래. 보리스는 눈물을 삼켜내며 오피스텔로 향했다.

 RICK. 삐뚤게 현관문에 붙어있는 아크릴 장식을 어루만졌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애틋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름 하나로 자신의 마음을 술렁이게 만드는 그인데. 이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 앞에 아른거리다 못해 흐려지는데.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은 자연스레 도어락을 열었다. 해야할 일이 있었다. 해야만하는 일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버려두는 것이 그에게도… 아니, 핑계를 대는 것 뿐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방법을 택하는 것 뿐이었다. 자신의 연인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고, 자신은 그런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현실을 네가 알기 전에, 지워버리는 것이. 그래, 고통의 싹이 되는 것은 뿌리부터 캐내어 자신이 삼켜버리는 것이. 그래, 그래.

 한참 후에야 문이 다시 열리고 보리스가 빠져나왔다. 양 손에 들린 커다란 가방에는 온통 자신의 흔적이었다. 브로데릭 로만. 그 이름에 새겨둔 자신의 흔적 중 일부였다. 그것을 지우기 위한 과정의 첫 걸음이었다. 죄책감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이끌리는 가방을 다잡으며 보리스는 계단을 내려왔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그마저도 삼켜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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