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던 적이 있냐만은, 한 번 생의 의지를 꺾어버린 이에게 살아남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간절히, 죽어버리라고 명한다면 기꺼이 총구를 자신에게 겨눌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찔한 경계에 서서 계속 생존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까. 죽지못해 살아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에게도 이유라는 것이 존재할까. 이미 쇠퇴하고 퇴폐한 도시 곳곳에 배드 컴퍼니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사라질 듯한 도시에서 로저는 여전히 불순물처럼 남아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무리가 아닌 개인으로서. 하나의 집단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소속이 사라지기는 했어도 그의 성격이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든 도시 자체에든 섞이지 못하고, 융화되지 못하고, 무언가를 버리지도, 다시 줍지도 못한채 애매하게 머무르고는 있지만… 분명히 살아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남의 물건을 훔쳤고, 위협이 되거든 방아쇠를 당기는 것에 망설임을 두었으나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언제나 가소롭지만, 언제나 자신을 존재하게 만들었다. 아직까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필요한 것 같은 곳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싶은 안일한 마음가짐. 애초부터 책임감은 잃었으니 그리고 무책임 하다고 해도 질타한 손가락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전보다는 그래도 나름, 제 멋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배드 컴퍼니에 물들어 인간성을 전부 내던졌다고는 해도. 타인의 죽음에 무뎌지지 못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한 그 무언가 때문이겠지. 언제는 자신을 동정받게, 언제는 자신을 미움받게. 그리고 또 언젠가는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던 이성이나 인간성, 도덕성, 질석의식 같은 것들. 그러므로 일부러 밤마다, 새벽마다 어둠에 자신이 묻힐 시간만을 노려 오다닐 때 발견하는 시신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어린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차게 식어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찌나 구역질 나고, 어찌나 서럽던지. 밤새 혼절하도록 울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울어봤자 누군가의 죽음은 생존으로 변하지 않고, 딱딱해진 시선은 다시 온기를 되찾지 못한다. 그러나 이미 썩어 문드러진 제 속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더럽혀질대로 더럽혀져서, 누군가가 직접적으로 물들이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연소해버린 것은. 그 때를 생각하니 또 속이 쓰린 것 같아 괜스레 손 안에 쥐고 있는 것을 고쳐 잡았다.

이제 옳은 일이 무어고, 그른 일이 무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었다. 도시에 홀로 남은 자신의 생에, 타인이란 그저 '타인'이란 추상적인 형태로 뭉뚱그려져 있었으므로. 그러니 지금 하려는 일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어쩔 수가 없어. 나는, 해야만 해, 라고. 무수한 합리화 끝에, 총 끝을 누군가에게 겨눴다. 작다. 자질구레한 감상은 방아쇠를 당기고 난 뒤에야 이어졌다. 아,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뒷통수가 터져버린 아이는 바닥에 쓰러졌고, 아이의 손에 들려있던 통조림들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라벨에 무어라 적힌 글자가 피 웅덩이에 굴러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로저는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아,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알고 있었다.

통조림을 집어들자 지독히 뜨겁고, 지독히 차가운 것이 손에 묻었다. 새빨간 것이 손가락 사이, 빈자리를 타고 뚝뚝 흘러 내렸다. 몇 방울은 손목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고.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노라니, 별안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헛구역질이 터지려는 것을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았지만 흉부가 들썩이고, 목젖이 꿈틀댔다. 결국 짧은 달음박질로 구석에 쳐박혀 우르르 서러움을 쏟아냈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어 목구멍이 쓰리도록 위액이 넘어오고, 타액과 섞여, 눈물과 섞여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눈을 질끈 감으면 현기증이 난다. 시야가 하얗다가, 까맣다가, 노랗다가, 제 스프레이 색처럼 어지러이 섞인다. 발걸음을 휘청이면 습관처럼 환청이 자신을 괴롭혔다. 주로, 알아 들을 수 없는 음성들이었다.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한 목소리들. 비명도 있고, 울음소리도 있고, 사죄도 있으며 꾸짖음도 있고 자신의 이름도 있고 타인의 이름도 있다. 그나마 뚜렷하게 들리는 어느 여자아이의 이름을 기억력 속에 맺어두다가 유성이 반짝이는 것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뇌리를 가로질렀다.

도치야, 로저. 아직 용케 안 죽었네.

아,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다. 내가 아는 목소리기도 하고. 안그래도 가쁜 숨이 조금 더 거칠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서럽다는 증거였다. 이미 한 번 터져버린 울음이 쉽사리 멈추지 않는 탓에 쭈그려 앉은채 흐느꼈다. 입 안이 쓰다. 입술을 말아 넣은채로 꾹 깨물어도 빈약한 울음 소리나 사그러들 뿐, 서러움은 가시지를 않았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도, 누군가를 부를 수도 없으니까. 자신을 질타할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서러움을 받아 줄 사람들도 없다는 뜻이며, 일말의 동정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고, 상대가 받아주든 그렇지 않든 제 멋대로 쏟아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냥, 혼자라는 뜻이야. 더이상 누군가와 비교 당하지 않아도 되지만, 고통받지 않아도 되지만. 누군가와 섞일 수 없고, '사람'이라는 존재에서 오는 온기를 느낄 수 없다. 그것이 너무 서러워서. 심장을 통채로 토할 것처럼 서럽게도 울었다. 진이 다 빠져 바닥을 짚은채 엎질러지고, 팔이 후들후들 떨리는데도 엉엉 울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하는 것은 기억하는 음성이 남긴 말이 있어서.

모든 잔인한 현장에, 네 표식을 새겨, 로저.

짠내를 삼키며 제 가방을 뒤적인다.

네 쓸모를 증명해, 블랙 사바스가 아니라, 너 스스로한테.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스프레이 사이를 뒤적였다. 온통 새카만 밤하늘 사이로 달이 제 존재를 틔운 것처럼, 흙더미 사이에서 꽃송이 하나가 만개한 것처럼. 노란 스프레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제 누구한테 인정 받을 필요 없잖아, 네 표식을 새기고, 누군가 널 무서워하게 둬.

자신의 손으로 만든 참혹한 현장을 돌아본다. 이제는 그저, 말그대로, 핏덩이에 불과한 시신을 바라보면 또 구역질이 났다. 제대로 시선을 두는 것이 두려워 눈을 꾸욱, 감았다 뜬다. 아른 거리는 얼굴들을 애써 지워내면 시야가 하얗게 바랬다. 차라리 볼 수 없으면 좋을텐데. 차라리 세상이 새하얗게 변질되어 무엇도 눈에 담지 못하면 좋을텐데. 이루어질 수 없고, 스스로 이룰 수도 없는 바람 끝에는 스프레이를 손 안에서 흔들었다. 스테인리스가 긁히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가 저를 괴롭혀도 묵묵히 눈을 감은 채였다. 뚜껑을 대충 바닥에 떨구고 나서야 그는 마음을 먹었다.

평소보다 훨씬.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옮겨지며 글자를 그린다. 자신이 질리도록 적었던 글자와는 다른 모양새다. 겨우겨우 R을 적고 나면 o로 이어지는 손이 후들거려 글자가 삐걱거렸다. 이후에 g, e, r… 이어지는 글자들도 형편 없었지만 제 이름을 적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는 것이므로. 제 이름은 금방 아이의 혈흔과 함께 번져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냥, 됐다. 스프레이를 바닥에 툭 떨구며 그는 가방을 추슬렀다. 바라건대, 생전에 네가 좋아하는 색이었기를. 샛노란 글자 아래로 핏물이 넘실거렸지만 못본척 통조림들을 주워 담고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의 말로는 참혹하고, 누군가의 말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살해현장을 뜬다.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방조했으며, 자신이 꾸몄고, 자신이 망친 곳. 건물을 나오자마자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탓에 또 눈알이 시큰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후드를 뒤집어 썼음에도 온 몸이 달달 떨려서, 골목길로 몸을 숨기고 나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아, 당당하게.

부탁이었을까. 아니면 바람이었을까. 또 아니면, 명령이었을까. 이미 제 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말이니 되물을 수도, 분간할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제 기억력을 헤집어 거의 유일하게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목소리인 것은 틀림이 없다. 조이. 기억하는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이 그 이름을 향한 것인지,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요. 그래도, 누가 대답해 주었으면 해서. 몸을 웅크린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내 어깨가 들썩이고, 재차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새카만 밤이었고, 새카만 외로움이었다. 온 세상에 저 혼자만 존재하는 듯한. 지독한 감각이었다. 손가락 사이에서는 아직도 비린내가 풍겨 울음소리를 덮고, 눈물을 덮었다. 오늘은 분명, 악몽을 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꿈 속에서라도,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러면.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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