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솔직히 이제 좀 지겹지. 창고문을 열자마자 창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더미들에 하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저들도 어디에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바람에 휘날려, 바람에 휩쓸려 내려왔다가 깔리고 뭉개져 이렇게 쌓인 것일텐데 미워하면 그건 좀 미안하지. 신발에 수북히 쌓인 눈들을 조심스레 치워내고 창고문을 끝까지 젖혀 올리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이 동네는 이상하게 눈이 많이 내려서 이렇게 눈 때문에 눈이 부신 것이 한 두번은 아니어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만 어둠에 익숙한 눈은 새하얀 세상을 볼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지만. 아릿하게 속눈썹 사이로 스며드는 눈부심에 하울은 눈을 질끈 감은채로 눈덩이를 손으로 눌러댔다. 눈도 좋고, 겨울도 좋지만 역시 문제는 먹잇감이 아닐까… 얇은 티셔츠 위로 스며드는 냉기가 곧 자신에게 불어닥칠 고비를 어슴푸레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울이면 늦은시간에 사람들이 잘 안다니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먹잇감이 부족하고, 그러다보니 구역내의 경쟁이 심해지고, 그러다보니… 자신은… 소외되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한심해 하울은 제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창피한 일이지만, 자신은 아직 약하니까. 몸이든 마음이든 정신머리든… 자각하고 있는게 어디냐 싶을정도로 나약하니까. 아침부터 자학하지 말아야지. 신발에 남은 눈과 함께 잔 생각을 떨쳐내며 하울은 발을 쿵쿵 굴렀다. 허기진 배를 조금이라도 채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새로이 들었다.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의 테두리를 따라 손가락을 문지르며 하울은 또 실없이 웃었다. 자꾸만 혼자만의 생각 끝에 웃음을 곁들이는 것은 어지간히 찌질해보이는 습관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만 혼자있게 되니까… 아무튼. 오늘따라 떠들석한 실내가 어색해 기껏 시켜둔 커피를 한 잔도 들이키지 못한채 하울은 먹잇감을 찾듯이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상하게 들뜬 분위기나 종소리가 섞인 음악소리나 빨갛거나 초록색의 실내 장식들이나, 트리랑… 어라.

 카페의 문에 달려있는 장식은 하도 본지가 오래되어 무엇이었더라 호칭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데 눈에 파묻힌 것처럼 떠오르지가 않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 장식에 눈과 머리를 집중하고 있을 때, 문이 움직이고 찬 바람과 함께 새로운 사물이 시야로 끼어들었다. 그것은 굳이 눈을 파헤치고 들어가 떠올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에 달려있던 장식과 달리 자신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사…"

"사이씨 오셨어요?"


 자신이 부르기도 전에 종업원의 경쾌한 목소리가 사이를 맞이했다. 여기서 마주칠줄은, 아니 이렇게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어 자신과 종업원 쪽으로 다가오는 사이의 모습을 얼빠진 표정을 하고선 쳐다봤다. 어지간히 멍청한 표정이리라 생각되지만 다행히도 사이의 시선은 오롯이 종업원에게 향해있었다. 가볍게 목인사를 한 사이는 종업원에게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고 종업원은 당황한 눈치로 자신과 카페 내부의 손님들을 훑어보더니만 조심스레 사이의 손에 둥그런 봉투같은 것을 내려두었다. 그것에 시선을 두지 않겠다는 듯이 사이는 얼른 그것을 제 코트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때까지 하울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었다.


"어머, 바로 가시게요?"

"응. 할 일이 있어."

"아쉽다~ 다음에 느긋하게 오세요."


 또 대답없이 두어번 끄덕끄덕. 그때까지 사이는 하울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섭섭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 갈게."

"네, 다음에 봬요. 아! 사이씨! 메리크리스마스!"


 아, 생각났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문에 달려있던 장식은 크리스마스 리스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아주 먼 옛날, 치열하고 고독함과 추위만 가득한 자신의 현재와는 다른 먼 과거에 손에 쥐었던 기억이 있다. 크리스마스여서 이렇게 사람이 많았구나… 그보다. 그 이름을 떠올린 것보다는 오늘이 크리스마스였다는 사실이, 그것보다는 사이가 돌아서고 있다는 사실이 하울을 강하게 흔들었다.


"사이!"


 하울은 터져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후회했다.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어서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자연스레 파묻혔지만 돌아서는 이를 불렀다는 것이 창피스러웠다. 더 창피스러운 것은 자신의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사이의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아니,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뚜렷하게 사이의 눈빛과 자신의 눈빛이 마주쳤다. 창고문을 열 때 자신의 발 위로 덮이던 눈보다 차가웠지만 그런 냉기따위 느끼지 않았다. 비단 당혹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사이와 시선을 마주친 것이 좋았다. 어찌됐든 그와 자신은 과거에 친구였고, 일방적이지만 현재에도 친구니까.


"메리…크리스마스…"


 하울은 터져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다시금 후회했다. 너무 본능적인 부름이긴 했지만 나가려던 사람을 일단 불러세웠으니 무어라 말은 해야겠는데, 너무 본능적인 부름이어 뒤이어 할 말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지라. 하울은 다시 한 번 생각없이 입술을 놀렸고 결과는 처참했다. 자신의 머리엔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깊이 자리잡고있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창피해하는 것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종업원은 자신이 사이의 이름을 불렀을때 잠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고 뒤이어진 말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누구나 하는 인사니까. 오늘은 크리스마스고, 아는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내미는 것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다만, 하울 자신만이 혼자 자신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선을 그어버렸던 것 뿐이지.

 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창피했고 실제로도 빨개진 것인지 귀가 뜨거웠다. 황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잠시후 짤랑거리는 방울소리가 났다. 아마 그가 나간 것이겠지… 사이는 뜨거워진 제 귀를 양 손으로 감싼채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 아이스커피를 한 잔 시켰다. 눈물나도록 뜨거운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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