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4. 09:32


비가 오면 생각 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추적추적 내리는 비사이로 구성진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구슬픈 한이 담긴 노래가락은 비오는 날 그 나이대 아저씨라면 쉽게 떠올릴 법한 노래였지만 애간장을 태우는 간드러지는 음성과 'XX고등학교'라고 정갈하게 적힌 명패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였다. 만약에 음성의 주인공이 제 아들 혹은 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럴싸 했겠지만 남백호, 40대를 코 앞에 아슬아슬하게 두고 있는 그는 아내도 없었고 자식딸린 홀애비도 아니었다. 그저 제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인을 기다리는 중이었지. 깜짝놀랄 유한을 생각하며 백호는 흥얼거리던 것을 뚝 끊어버린채 흐흐흐, 노래를 부를적보다 더 수상하게 웃었다.


 기다림이 조금 길어질때 쯤, 신고 나온 샌들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발가락이 꿉꿉할때 쯤, 나오기 전 성재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일렀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갑자기 찾아가면 형수님이 놀라실텐데요. 형수님이 아니더라도 보는 눈이 조금…. 형님, 미리 연락을 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웬 걱정이냐며 먼지처럼 털어버리고 나온 말이었지만 새삼스레 걱정되는 것은 세워둔 차에 비치는 제 모습이 꽤 수상했기 때문이다. 그걸 이제서야 느끼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인것도 모른채.


 어둑한 기온 아래 붉은색 꽃무늬 셔츠가 오늘따라 선명하게 빛났다. 오늘은 돈 떼먹구 나른 놈들 패지도 않았구, 월세밀린 놈들 가게가서 깽판치지도 않았는디 왜이렇게 핏빛이다야. 물방울이 튀어 짙게 물든 부위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내며 백호는 입술을 비죽였다. 조금 더 얌전하게 입고 나올걸 그랬나. 눈 앞에 아른거리는 보라색 셔츠를 떠올릴때 쯤 소란스러운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제야 학교가 파한 모양이었다. 속상함도 잊은채 백호는 얼른…! 몸을 숨기고 말았다.


 내가 왜 숨었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 벽 뒤에 숨은채 얼굴만 빼꼼, 개죽이마냥 내민 백호는 5초만에 의아함을 느꼈다. 학교가 파하면은 울 애그가 나오는디, 그거 챙겨갈라구 여즉 기다린건디? 멍하니 생각에 빠지다가도 교복무리가 제 곁을 지나가며 흠칫거리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성재가 말한─보는 눈이 조금─ 것이 내심 신경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학부모가 이렇게 요란스레 입는다냐! 아니, 별루 요란스레 입은 것두 아닌디! 내는 원래 이렇게 입고다녀야! 이게 뭐 워때서! 속으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수십명의 학생들이 지나갔고 열에 다섯은 백호를 흘긋거렸다. 본인은 그것을 알까 모르겠지만.


 결국 백호가 선택한 것은 이리 숨어서 유한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자신이 숨어있는 벽을 끼고 돌때쯤 휙 납치하는 것이었다. 아니, 갑자기 붙들면 놀랄 수도 있으니까 조금 뒤로 물러서서 기다릴까. 그 다음에 애그야! 하고 부르는… 아, 아니지 조금 더 자연스럽게 유한아! 하고 부를까. 선택장애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발걸음이 물웅덩이를 몇 번이고 찰박거리는 사이 유한은 천천히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저씨한테 전화해볼까. 비오는데 밖에서 일하진 않을까. 그런 사사로운 생각에 잠겨 백호가 마중나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애, 애그야!!"


 결국 백호가 선택한 것은 평소에 자주도 부르던 호칭이었다. 사실은 유한아, 그리 불러야지 마음먹고 뒤돌아섰건만 돌자마자 눈 앞에 떡하니 자리한 유한의 모습에 습관처럼 호칭이 튀어나오고만 것이었다. 그 요상스러운 호칭에 노골적으로 흘긋거리는 시선이 따가웠던지 유한은 얼른 백호의 손목을 낚아채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와중에도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처럼 애, 애그야, 아재가 있제! 평소답잖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버벅대는 것이 우스워 심각했던 유한의 표정이 살금살금 풀려갔다.


 인적이 조금씩 드물어지고 자신들을 흘겨보던 인파들이 아득하게 멀어졌을때 쯤에야 유한은 튀긴 빗방울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풀었다. 그러자 얼른 유한의 손을 끌어당겨 제 셔츠자락에 문질러 닦는 백호의 행동에 결국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저씨 옷 젖잖아요."

"우리 애그 손이 더 중요혀. 차갑진 않구?"


 까슬한 볼에 손등이 닿자 뜻뜨미지근한 것이 느껴졌다. 그와는 별개로 마음 한 켠이 뜨끈하게 뎁혀졌다. 백호가 유한과 함께, 유한이 백호와 함께 있으면 으레 그러하듯이.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마중 나온거예요?"

"아, 아아! 맞다! 그려, 그려. 비오니깐은 우리 애그 생각나서 얼른 나왔여."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저 몇시에 끝나는지도 잘 모르면서."

"대충은 알어. 애그가 '저 학교 끝났으요~'하고 맨날 문자 보내니깐은 알제~"


 내가 언제 그렇게 문자 보냈다구. 자연스레 일는 웃음을 터뜨리자 백호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이내 얼른 우산을 접고 유한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큰 우산을 쓰고 왔다지만 성인 남성, 그것도 덩치라는 말이 썩 잘어울릴 법한 사내가 뛰어들자 단박에 좁아진 느낌이 들어 유한은 위태로움을 숨기지 못하고 바싹 우산을 당겨 쥐었다. 뭐하는 것이냐고 굳이 묻지않아도 허리와 어깨로 감겨드는 손으로 그의 의중을 알아챈 유한은 천천히 기대듯 밀착했다.


"비 다 맞겠다."

"그럼 얼른 뛰쳐가자잉. 우리 애그 감기걸려."


 그냥 우산을 따로 쓰면 되잖아요. 밉지않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려던 것을 참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멈추었던 발걸음을 천천히. 얼른 가자던 말과는 달리 여기까지 걸어왔던 것보다 느린 속도로 딛었다. 그에 속도를 맞춰 걷는 유한도 딱히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빗소리는 고요했고. 맞붙은 옷자락은 끈적했지만 그 아래로 온기가 오고가 기분이 좋았다. 쌀쌀한 바람보다는 습기가 가득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내심 두근거리는 속내를 감출 수가 없어 유한은 아저씨, 괜시리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응? 하고 바로 답해오는 들뜬 음성이 빗소리와 함께 섞이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린 유한은 조용히 그의 뺨에 입맞추었다.


"마중 나와줘서 고마워요. 기분 좋아요."


 고마운일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보답하는 것도 잊지않고. 발 아래를 쳐다보며 넌지시이른 감사의 말에 백호의 얼굴이 얼빠졌다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가, 이내는 환하게 웃음을 그렸다. 벼, 별거 아닌디 애그두 참! 왠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백호의 표정이 눈 앞에 그려져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 가는 내내 대화보다는 웃음이 가득한, 참으로 조용하고 고요하고 행복한 귀가길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 행복하다는 그 흔해빠진 말이 절실히 공감되는 발걸음이 집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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