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요, 매일이."
괴롭다는 표정으로 일러오는 말에 무어라고 답해야할까. 사내는 그 어떤 단어나, 음절도 뱉지 못한채 느리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매일이 괴롭다고 하면은, 차라리 도망치라고 할까. 혹은 포기하라고 할까. 혹은, 이제 끝내라고? 사내의 공감 능력은 그리 온전치 못했다. 아니, 사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닌가. 그저 우연히 탄 버스에서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던 어린애에게, 조언하나 해주지 못한다고 해서 공감력이 부실한 것은 아닌가. 오래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 사내는 입술 새로 옅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 꽁초를 바닥으로 툭, 떨어뜨리고 나서는 손 안에 쓴내를 가득 담은채로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냈다. 사내가 할 수 있는 최선. 폭신한 말이나, 달달한 위로 같은 것은 해 본 적도 없으니 그저 투박한 손길.
웨인. 그가 새겼던 전화번호는 손바닥에도 손등에도 더이상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주먹을 한 번 꽈악, 쥐었다 풀면 번져 사라지던 잉크같은 것이었다. 타인이라는 것이. 사내에게는 지나치게 가볍고, 무의미해서. 금방 시야에서 감추면, 기억에서 옅어지고, 마음에서 흩어지는 존재. 그럼에도 사내는 기어코 그의 머리를 쓸어내는 것이었다. 서투르고 투박하기는 하였으나 온 진심을 담아서.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네가 괴롭다는 말에 무언가 말해주기 위해 고민했다는 마음, 그만큼 네가, 생각보다, 나한테 무거운 존재라는, 진실.
어차피 사라질 풍경이라면 눈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맞았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풍경이라면 차라리 외면하고 앞만 바라보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그가 시야에 온전히 끼어든 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웃음이 자꾸 떠오르고, 바라보던 시선이 뇌리에 꽂히면, 색이 없는 무대에 서서 기타를 쥐고 있을 상상하면, 온 세상이 어찌도 그렇게 밝은, 지. 사내의 생각이 끊겼다. 가볍게 쓸어내던 손길마저도 멈췄다. 조금, 아주 조금, 부끄러운 것 같았다. 그러니 터져나오는 마음을 막고자, 사실을 고하려는 입을 다물고자 고개를 틀어 그의 입술 위에 입맞췄다. 머리를 쓸어내던 손으로 그의 옷깃을 쥐어 잡고, 다시는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쥐어잡고.
그것은 그가, 웨인, 네가, 나에게 지나치게 간섭했단 의미기도 했다. 도대체 언제, 눈에 들어온걸까. 언제 나를 붙들고, 언제 나에게 들어와, 언제 이렇게, 이렇게… 괴롭다던 것은 그인데도 자신이 괴롭다는 듯 사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입술이 물러나고 호흡이 터져나오기도 전에 그의 옷깃을 다시 낚아채며 끌어당겼다. 거칠게 입술이 부딪히면 숨이 벅차올랐다. 호흡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가 커다랗기 때문이었다. 사내의 안에서 웨인 디샤넬, 그 이름이 너무나 컸다. 너무나 무거웠다.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사내는 방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돌려말할 수는 없으니 사실을 고하자면, 그를 사랑했다. 사랑했다. 사랑했다, 그를. 사랑했다. 그 감정 하나로 표류하던 몸뚱이가 수면 아래로 깊숙히 빠져들었다. 온통 젖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엄쳐 나갈 수가 없었다. 벌써 이만큼,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까. 네가, 알까. 내 마음을, 알까. 이만큼 무거운 감정을 가지고, 네게 입맞춘 다는 것을 알기는 알까. 생각이 잔상처럼 머리를 스쳤고, 사내는 그것을 금방 치워버렸다. 입술이 떨어지면 곧바로 숨쉬듯이 뱉었다.
"사랑해."
갈라진 목소리가 그에게 답했다. 감고 있던 눈이 뜨이고, 고동색 눈동자가 습관처럼 사내를 마주하면 사내는 되려 눈을 감아버렸다. 괴롭다. 그가 괴롭다고 하던 것을 알겠다. 괴로워, 존나 괴로워.
사랑해서 괴롭다는 그 유치한 단어들의 조합이. 사랑해서, 매일이 괴롭다는 그 말이 이렇게, 절절하게, 아프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공감되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에. 웨인 디샤넬,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낭만으로 반짝거리는 그를 사랑하기에. 네 웃음, 표정, 얼굴, 머리카락, 손길, 몸, 걷는 소리와 목소리, 나와 어긋나버린 스물 하나의 시간까지도. 아주 오래 전부터 정해져있던 것처럼 사랑, 하게 된 것이다. 새삼스러운 사실에 마음이 갑갑했다. 전할 수 있는 말이 고작,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고작. 사랑한다는 말 뿐이라서.
사내는 글이라는 것과 멀리 떨어져 지낸 시간들을 후회했다. 온 세상의 단어를 끌어안고, 뒤져도, 그를 향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자신이 아는 세상이 너무 좁고 작아서, 잔뜩 찌푸려진 표정이 풀릴 새가 없었다. 그것이 걱정됐던지 그는 사내에게 괜찮아요? 가만 물었고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가만 품에 끌어안은채, 끌어안긴채, 눈을 천천히 떴다. 어두운 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밤 공기가 두 인영을 스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현실이구나. 사내는 안도하듯 한숨을 길게 내어쉬며 웨인,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면 사랑해, 버릇처럼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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