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무언가에 집중하는 일이 어려웠던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독서였다. 자신의 엄지 손톱보다 작고 새끼 손톱보다는 큼직하게 새겨진 글자 나부랭이들에 집중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지만 제 어미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조잘거리며 쏟아지는 음성, 그 안에 담긴 글자들과 그것들이 담고 있는 의미들은 지나치게 흥미로웠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어린 그는 홀로 공공도서관에 발을 딛었고 제 이름, 로미오 반즈가 정갈하게 적힌 책갈피를 만들었으며, 책을 한 권 빌릴때마다 붉은 도장이 찍히는 것을 가장 즐거워했다. 질식할만치 높게 뻗은 책장을 보고 넋이 빠졌던 그 어린날부터 시작된 우연이 첫 직장이라는 이름까지 이어지기까지, 그 젊은날로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책들이 그를 스쳐지나갔고, 수만개의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달콤하게 울렸으며, 수억개의 단어들, 활자, 종이, 잉크, 햇빛, 바람, 소근거리는 음성, 바코드 소리, 발걸음, 키보드의 작은 소음까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것들이 무수히 그를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새에 시간마저도 그리 부질없이 그를 스쳐 지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도서관은 그에게 항상 아늑한 곳이었고, 책이라는 것은 그에게 항상 또 다른 현실이었다. 햇빛이 가장 잘 스며드는 자리에 앉아서 바삭하게 타버릴 것 같은 종이에 그려지듯 새겨진 글자들을 읽으며 그 안으로 빠져드는 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집중할때는 마치 자신이 그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목이 구부정하게 굽을 정도로 열심히 책을 읽는 그를 보며 젊은 사서는 "현실로 돌아가야 할때란다, 로미오." 하고 속삭이곤 했다. 꼭 소설 속 여자 주인공처럼 다정한 말투였다. 그럼 어린날의 자신은 얼른 고개를 쳐들고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현실이 어느쪽인지 순간적으로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꽤나 오래된 습관으로, 아저씨라는 말이 썩 익숙하게 된 현재에도 가끔씩 겪는 난황이었다.
작은 온점과 함께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로미오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한참을 흘려보냈다. 방금전까지 자신의 입술과 눈과 머릿속에서 굴러다닌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습관처럼 벽면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시계는 없었다. 있어야할 자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이곳은 자신이 일하던 도서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곳은 이제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다시 문을 닫았다. 책을 골랐다. 자리에 앉았다.
책이라는 것은 그에게 항상 또 다른 현실이었다. 가끔은 현실이 어디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집중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이따금씩 현실을 잊게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고약한 도피방법이기는 했지만, 누군가는 책에게 실례인 일이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방법 중에서는 가장 최적이었다. 현실이 아닌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것이 자신이 겪는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습관처럼 벽면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시계는 없었다. 있어야할 자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이곳은 자신이 일하던 도서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곳은 이제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다시 문을 닫았다. 책을 골랐다.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현실로 돌아가야 할때란다, 로미오.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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