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날이 개었다. 다미는 장마철이 아님에도 멈출 줄을 모르고 후두둑거리는 탓에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끙끙거리느라 엉덩이가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보통같았다면 얼른 뛰어나가 물만난 고기마냥 비를 맞으며 놀았겠지만, 일전에 그렇게 망나니처럼 놀았다가 감기에 들리고 나서는 자상한 잔소리쟁이, 몽블랑이 '비오는날 외출 금지령'을 내려버려 철창안에 갇힌 새마냥 날개만 퍼득거릴 뿐이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책을 붙들고 있거나 노트에 이것저것 써내리는 것도 천방지축 날뛰는 다미의 흥을 진정시키지는 못하는 일이었다. 제 아무리 보모라고 불리우는 몽블랑이라고 해도 나가서 놀고싶다 찡찡거리는 17세 유치원생을 달래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터라 난감해하던 찰나, 오늘은 오랜만에 날이 개어 창문으로 햇빛이 고요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무거운 팔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와 몽블랑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단단히 닫아둔 창문을 열었다. ​겉보기에 인형탈의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순간 확 표정을 찡그릴 정도로 밝은 날이었다. 한동안 날이 어두웠던 탓에 더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놀러 나가자고 하면 뛸듯이 기뻐할 제 파트너의 표정이 눈 앞에 훤해 저도 절로 선하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 천덕꾸러기가 일어날 시간은 아직 한참 멀었으나, 비가 오니 창가에 앉아 빗방울을 세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었던 그녀에게 밤은 너무 길었기에, 분명히 일찍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쯤 깨워도 가볍게 칭얼댈 뿐 금세 기운을 차리겠지….

 다미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선반에서 컵을 두 잔 꺼내두었다. 인형탈 모습일적엔 손이 뭉툭한 탓에 커피 한 잔을 타는 것도 힘든 일이었는데, 요 근래 다미가 커피 끓이기에 맛을 들여 커피란 커피는 온통 그녀가 끓이게 되었다. 커피가 마시고 싶을때마다 일일이 시키기는 것은 어지간히 번거로워 혼자 묵묵히 커피믹스를 뜯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후다닥 달려와 그것을 낚아채기도 했다. 하여간, 왈가닥도 그런 왈가닥이 없지… 또 한 번 부드러이 미소지으며 몽블랑은 다미의 방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똑똑, 새소리같은 작은 노크에 깨어나지 않을 것을 알지만 숙녀의 방 앞에서 관례처럼 한 번 예의를 차려주고.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자 문을 살며시 열었다. 살금살금 햇살이 스며드는 하얀 침대위로 주황색 머리카락이 부산스레 흩어져 있었다. 아직 말을 건내지도 않았건만 잠투정을 부리듯 이불 아래로 꾸물거리는 발가락을 보며 몽블랑은 소리내 웃었다. 물론, 들리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다행인 일일지도 모르고.

 일어나 다미야, 해 떴어.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속으로 삼키고 보드에 사각사각 적어내리며 몽블랑은 분주히 다미를 깨울 아침을 열었다.​